[최보식이 만난 사람] "墜落 없을 수 없지만… 안 죽을 만큼의 실패는 많을수록 좋아"


    입력 : 2015.11.30 04:18

    [클라이머 3000여명 배출 '정승권 등산학교' 25년… 산꾼 정승권씨]

    "드라마 '산' 촬영 중 인수봉 추락한 배우 홍리나
    이마에서 피 흘리면서도 내게 '거울 보여달라'고 해"

    "등반 장비 주렁주렁 매단 아웃도어 광고 속 모델
    암벽에서 빙벽 장비 걸기도… 광고는 연출… 착용법 잘못돼"

    바람 불고 눈이 내렸다. 암벽 아래에서 정승권(55)씨가 클라이밍 장비를 챙기면서 말했다.

    "연예인이 등반 장비를 주렁주렁 걸고 나오는 아웃도어 광고를 보면 제대로 맞게 착용한 게 없어요. 장비가 잘못된 위치에 걸려 있거나 어떨 때는 암벽 밑에서 빙벽(氷壁) 장비를 걸고 있어요."

    ―광고 연출이지, 그 연예인이 직접 등반하는 게 아니니까요.

    "1996년 MBC 드라마 '산(山)' 20부작 촬영 당시 제가 일년간 코디네이터를 하면서 배우 감우성·천호진·김상중·홍리나·최종환씨를 가르쳤어요. 특히 천호진씨와는 함께 암벽등반도 종종 했어요. 영화 '빙우(氷雨·2004년)'를 찍을 때는 송승헌·이성재·유해진씨를 교육했어요. 마지막 날 인수봉까지 올라가 하룻밤 비바크(Biwak·산에서 텐트 없이 자는 것)도 했어요. 작품 연기와 관계되니까 몸을 사리지 않고, 습득력도 대단했어요."

    히말라야 8000m급 등반에서 기록을 낸 허영호·엄홍길·고(故) 박영석 등 스타 산악인에 비해 그는 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산꾼 세계에서는 그만큼 '선생님' 호칭을 많이 듣는 산악인도 드물다. 그는 1990년 '정승권 등산학교'를 열었다. 클라이밍 교육을 하는 한국산악회와 코오롱산악회가 있었지만, 개인이 등산학교를 연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결혼한 직후 가족 생계를 책임지려면 산을 떠나야 했어요. 하지만 산은 내 인생이기에 절대 떠날 수 없었어요. 등반을 계속하려면 손(후원)을 벌려야 하는데 그건 또 내 성격에 안 맞았어요. 내가 산에 남을 수 있는 타협안이 '등산학교'였지요."

    故 고미영씨 사진
    故 고미영씨

    이제 '정승권 등산학교'는 25년을 맞았고, 졸업생을 3000여명 배출했다. 해외 원정을 준비하는 전문 산악인들도 고급 등반 기술을 배우러 온다. 히말라야 14좌 레이스를 펼치다가 2009년 낭가파르바트봉에서 숨진 여성 산악인 고미영씨도 그에게 빙벽 등반을 배웠다.

    "농촌진흥청에 근무하던 고미영이 '농촌지도사들에게 암벽등반 강의를 해달라'고 전화를 걸어와 처음 만났어요. 그때는 펑퍼짐한 체형이었어요. 그 뒤 어떤 자극을 받았는지 스포츠클라이밍을 시작했어요. 기량이 일취월장해 세계대회에서 우승하고, 대단했어요. 어느 날 내게 빙벽 등반을 가르쳐달라고 했어요. 히말라야 원정 목표를 세운 뒤였어요. 욕심이 많고 강인한 여성이었지요. 에피소드라 할까, 한번은 남녀 산악인들이 모여 술을 엄청나게 마셨어요. 나중에 고미영이 쓰러졌어요.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고. 결국 내가 고미영을 둘러업고 우리 집으로 데려왔어요. 아내가 그 모습에 황당해했지요."

    ―암벽등반 하다가 추락 사고가 종종 발생하는데, 위험하지 않나요?

    "자기 능력에 맞는 루트에서 안전 수칙을 지키면 사실 거의 사고가 안 납니다. 물론 불가항력적인 사고도 있겠고. 등반은 '수직 상승'이니까 추락이 없을 수 없죠. 그런 경우에도 안전줄이 확보돼 있으면 찰과상에 그쳐요."

    ―본인이 추락한 경우는?

    "많이 다쳤죠. 팔다리·허리·머리까지 다 다쳐봤죠."

    ―최고 전문가가 이렇다면 안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젊은 혈기에 과욕을 부리거나 자만할 때 사고가 있었어요. 2006년 경기 포천의 인공 암벽에서 단독 등반하면서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다가 중간의 확보물이 빠지는 바람에 30m 높이에서 떨어졌어요. 몸이 안 움직여 어디 부러진 줄 알았는데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았더라고요."

    ―가장 치명적인 사고는요?

    "1997년 후배들과 월악산 빙폭에서 등반하다가 8m 아래 바위에 떨어졌어요. 얼음에 박은 피켈이 빠졌던 겁니다. 내 기량을 워낙 자신해 피켈을 얼음에 박는 게 아니라 살짝 걸면서 올라가다가 사달이 난 거죠. 밑에 있는 로프 확보자도 느슨하게 있었고. '내가 죽었다'는 소문까지 났어요. 나의 과욕(過慾)이었어요. 하지만 죽지 않을 만큼의 실패는 많을수록 좋다고 봅니다. 그런 실패가 나중에 등반 자산이 되니까요."

    ―병상에 얼마나 누워 있었나요, 후유증은 없습니까?

    "드라마 '산' 촬영이 막바지여서 일주일 만에 퇴원했어요. 촬영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요. 병원에서는 '죽을지도 모른다'며 각서를 쓰라고 했어요.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퇴원해 촬영 마무리를 하고 나니 감독이 대본에 없는 장면을 추가로 찍자고 부탁했어요. 배우 홍리나씨가 북한산 인수봉에 매달려 로프를 칼로 자르고 떨어지면 주인공이 팔을 뻗어 붙잡는 신이었어요."

    ―여배우가 직접 암벽에 매달린 겁니까?

    "그때는 CG(컴퓨터 그래픽)가 없었으니까요. 홍리나씨도 내게 암벽등반 교육을 받았어요. 하지만 그날은 겁에 질려 있었어요. '안 올라가겠다'고 하다가 '그러면 선생님만 믿고 가겠다'고 했어요. 암벽에 매달려 대사(臺詞)를 하다가 칼등을 로프에 대는 장면인데, 계속 NG가 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쥔 칼이 움직여 칼날 쪽을 로프에 댄 거예요. 70m 아래로 떨어졌어요."

    ―당신은 그때 어디 있었습니까?

    "5m 위 슬랩(미끄러운 바위)에서 감독 옆에 있었지요. 갑자기 홍리나씨가 내 눈에서 사라진 거예요. 추락 지점에 내려가니 그녀의 이마에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다리도 부러지고. 그녀가 내게 '거울을 보여달라'고 했어요. 여배우에게 얼굴이 생명이니, 정말 애절하더군요. 신문에는 '로프 매듭이 풀렸다'고 보도됐어요. 그러면 내 책임이지요. 카메라를 판독해보니 칼이 그렇게 돼 있었어요."

    그는 도봉산 선인봉에 '학교길'과 '현암길'을, 설악산 소토왕성골에는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라는 암벽 루트를 개척했다. 무엇보다 1993년 2월 13일 밤, 그가 로프 없이 양손에 피켈만 들고 혼자 정상까지 올라가 다시 빙벽을 찍으며 거꾸로 내려온 설악산 토왕성 빙폭(320m) 등반은 산꾼 세계에서는 '전설'로 남아 있다.

    또 그는 한 팔과 한 다리씩 사용하는 'N-BODY'라는 독자적인 빙벽 등반법을 개발했다. 국내 빙벽 등반의 교과서처럼 됐다. 1970년대 미국 산악인 이본 취나드(아웃도어 업체 파타고니아 회장)가 체계화한, 양팔과 양다리를 벌려 X자처럼 오르는 'X-BODY' 방식을 뒤집은 것이다. 이런 국내 최고의 등반가가 허영호·엄홍길·고 박영석만큼 조명을 받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단 한 가지 이유였다. 한창 불붙었던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등반 경쟁에서 그는 빠져 있었던 것이다.

    정승권씨는 “내가 우리나라에서 암벽 등반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정승권씨는 “내가 우리나라에서 암벽 등반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히말라야 고산 등반을 안 했던 게 아닙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기념 에베레스트봉(8848m) 원정에서 대원으로 뽑혔지요. 당시 저를 포함해 여섯 명이 노멀 루트(가장 많이 이용하는 등반로)로 정상을 밟았습니다. 엄홍길도 이때 첫 등정을 했지요. 당시 김포공항에 내려 시내까지 카퍼레이드를 했어요."

    이듬해 안나푸르나봉(8091m) 원정대에서 그는 등반대장을 맡았고, 동갑내기 친구인 엄홍길은 대원이었다.

    "기상이 안 좋아 진척이 없었어요. 당시 '캠프3'까지 장비를 올려야 하는데 내가 셰르파를 인솔해 올라갔어요. 캠프3 지점 바로 아래 100m 높이 세락(serac·탑 모양의 얼음 덩어리)이 형성돼 있었어요. 셰르파들이 '못 올라가겠다'며 짐을 두고 내려가 버렸어요. 셰르파에게 위험 수당을 더 주겠다고 했으면 달라졌을지 모르죠. 결국 혼자 캠프3에 올라가 내 짐만 두고 내려왔어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 문제로 대원과 언쟁이 벌어졌어요. 별거 아닌데 나의 예민한 성격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현지 포터(짐꾼)들이 30kg 안팎의 무거운 짐을 베이스캠프까지 날라주고, 셰르파들이 앞장서 눈길을 뚫고 장비를 올려주는 것이 과연 내가 추구하는 등반인가. 셰르파에 의존하는 이런 등반에 회의가 있었지요. 원정대는 실패하고 돌아왔지요."

    ―그 뒤, 히말라야 고산 등반을 접었습니까?

    "다음 해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가 꾸려졌을 때도 제안을 받았어요. 내 기량은 최고였으니까요. 하지만 히말라야 원정은 등반 기량에만 달린 게 아닙니다. 대부분 노멀 루트에서는 고난도 암벽 기술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고요. 내게 의미 있는 등반을 하고 싶었어요. 당시 아내가 임신 3개월이기도 했고. 그해 등산학교를 열었어요."

    그는 다른 길을 걸었다. 미국 요세미티의 거벽(巨壁) 엘 캐피턴, 남미의 세로토레벽 등을 등반했다. 등반하는 동안 식수와 장비를 로프로 올리고, 밤에는 포털레지(암벽에 고정시킨 허공침대)에서 자는 식이다. 2000년 겨울 엘 캐피턴의 벽에 매달린 지 9일째가 됐을 때 폭설이 퍼부어 생사의 갈림길에 선 적이 있었다.

    2002년 세로토레벽 등반에서는 꼬박 48시간 동안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등반하기도 했다.

    ―동료 산악인들이 8000m급 14좌 등반 레이스로 조명을 받을 때 소외감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나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은 즐기지만, '몇 개 더 올랐느냐'로 남들과 경쟁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 경쟁에는 등반의 즐거움이 놓일 자리가 없어요."

    ―암벽등반의 매력은 뭡니까?

    "우리가 사는 수평(水平)의 일상에서 벗어나 한발 한발 고도를 높이며 올라가면 두려움이 있지요. 하지만 바위의 틈새나 돌출부를 꽉 움켜쥐었던 손가락 끝에 남아 있는 통증의 감각이 그렇게 좋을 수 없어요. 그런 감각에 중독된 건지 모르죠."

    ―하지만 이제 50대 중반인데, 등반은 단조로운 일상의 밥벌이처럼 되지 않았나요?

    "그런 면도 있지만, 여전히 등반은 좋아요. 고교를 졸업한 뒤로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등반을 해온 산악인은 별로 없지요. 나는 80세까지 암벽을 할 겁니다. 나를 뭐라고 할까, 우리나라에서 암벽등반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